나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창업한 27살의 여성 대표이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돌아오는 5월 22일, 창립 5주년을 맞는다. 22살부터 27살까지, 5년 간의 도전을 돌아보고자 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유별나게 돈 버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아이였다. 초등학생 때는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300원에 대여해 주었고, 학생 시절에는 학교 마크가 새겨진 패딩을 공장에서 주문 제작해 천 벌 넘게 팔기도 했다. 점점 스케일이 커져서 나중에는 미국에서 에어팟이 출시되었을 때는 중국에서 대량으로 케이스를 들여와 한국 출시 시점에 맞춰 풀어보기도 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공모전에 참가해 상금을 휩쓸었다. 여러 차례 심사장에서 만난 심사위원들로부터 “상금헌터”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게임해서 이기면 도파민이 도는 것처럼, 돈을 버는 자체가 큰 성취감을 주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넘었지만, 잘 벌면 매달 몇 백원씩 수중에 들어오고는 했다.
하고 싶은 일은 기어코 해내야 직성을 풀리는 성격 덕분에, 21살 대학교를 다니면서 예비 유니콘 스타트업 몇 곳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 스타트업이라는 곳은 나에게 말도 안되는 기회를 주었다. 내가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만나보지도 못했을 대표님들 옆에서 스타트업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 스타트업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이듬해 봄, 나는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딥러닝 회사를 차리다.
22살의 나는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고심했다. 먼저 트리를 그렸다. 제조업은 시작부터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서 제외.
그렇다면 스프트웨어 업종인데,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플랫폼은 돈을 벌기까지 플라이휠이 너무 커서 제외.
그렇게 하나씩 지워가면서 떠로은 것이 OCR 소프트웨어였다.
나는 아버지가 컴퓨터비전 개발자 셔서 어릴 때부터 컴퓨터 비전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2019년 당시 컴퓨터 비전 분야의 화두는 딥러닝을 접목시킨 새로운 기술들이었다. 대표적인 기술로는 Detecting(물체 감지), OCR(문자 인식), Recognition(물체 인식)이 있었다. 그중 OCR은 엔진을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지속적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OCR은 고전적인 기술이었지만, 이전에는 매우 제약된 환경에서 밖에 동작하지 않았기에, 이번 딥러닝이 접목된 새로운 방식의 OCR은 다른 시장이 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나는 딥러닝 기반의 OCR 기술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창업진흥원이 주관하는 기술혁신형 기업 지원사업(현 예비창업패키지)에 선정되어 8천 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전에 벌어놓은 돈과 합쳐보니 3억이 넘는 자금이 마련되었고, 이를 시드머니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먼저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큰 돈을 많이 벌 것이라 확신했기에 처음부터 법인 사업자로 시작했다. 회사명은 최대한 올드하고 공공기관스러운 이름으로 지었다. 어린 나는 신뢰를 주기 어려울 것 같아, 회사의 이미지와 브랜딩으로 신뢰를 주려는 전략이었다.
동시에 OCR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형 IT기업에서 OCR을 만드는 개발자를 찾아 과외라는 명목으로 함께 개발을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구글링하고, 유튜브에서 강의를 보며 해결했다. 하지만 당연히 성능이 미진하고 진도도 너무 느렸다. 그러던 중, 화면에 켜져있던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강의는 유명한 인도 개발자가 진행한 것이었는데, 질문을 받기 위해 공개해 준 메일 주소가 보였다. 그래서 무작정 연락을 시도했고, 이틀 만에 답장을 받았다. 본인이 리드하는 개발 팀이 있는데 정식으로 미팅을 가져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3억 중 2억은 COR기술개발에 투자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법인 회사를 세웠지만 처음에는 보잘것없었다. 창업 전에 날아다니던 내 모습과 비교하면 그때의 나는 나는 너무 초라했다. 잠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루에 18시간 이상 일을 했다. 매일 오후 서너 시에 눈을 떠 컴퓨터 앞으로 직행해 모니터만 주야장천 봤다. 그대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되면 책상 옆 매트리스에서 쪽잠을 청했다. 놀랍게도 혼자 일하면서도 화장실 가는 시간이 아까워 볼일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곤 했다.
회사를 홍보하기 위해 여러 박람회나 콘퍼런스도 참석했다. 갈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비즈니스의 장에서 창업한 어린 여성 대표를 환영할 리 만무했다. 한 번은 콘퍼런스에서 발표를 마친 대표님께 기술을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대표는 ‘어려워서 모르실 거예요.’라는 짧은 대답을 했다. 나는 멋쩍어 뒤돌아 섰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다른 중년의 남성이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그 대표는 방금 전과는 180도 다르게 열과 성을 다해 본인의 기술을 설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무시와 조롱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수치를 느낄 때마다, 수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수치를 받을 만한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예술과 SW를 같이 전공한 덕에 디자인과 코딩이 모두 가능했기 때문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필요한 건 다 했다. 홈페이지 SEO를 위해 밤 새 HTML을 고치고, 브로슈어를 디자인해서 기업 지원센터에 배포하고, 포스터를 만들어 판교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녔다. 박람회에서 명함을 돌리고, 지원사업이나 PoC 사업은 웹 크롤러를 만들어 실시간으로 신청했다. 동시에 OCR 성능 개선을 위해 어떤 단어에서 자주 오타가 나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수천 번의 피드백을 주며 밤낮을 보냈다. 그렇게 1년 동안 혼자 외로운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대형 고객사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내 첫 OCR 계약은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데 도입되었다.
팀이 생기다.
이후 대형 고객사들이 우리를 꾸준히 찾아왔다. 다행히 개발한 OCR 엔진은 꼼꼼한 검수와 재학습 덕분에 목표치를 훨씬 상회하는 성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스타트업 대표님들 사이에서 내가 OCR 솔루션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바우처를 통한 솔루션 구축 문의가 쏟아졌다. 갑자기 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진 나는 가지고 있던 1억과 부지런히 받아둔 창업 지원금으로 개발자들을 추가 채용했다. 하지만 서울도 아닌 용인에 AI 개발자들이 많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채용 사이트에 정성껏 글을 올려도 해야 할 일에 비해 개발자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첫 팀이 생긴 건 2020년 여름이었다. 그날도 밤을 새워 일하고 있던 내 눈에 남동생이 들어왔다. 동생은 개발자 부모님 덕분에 다섯 살 때부터 코딩 과외를 받아온 컴퓨터 덕후였다. 게다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에 능숙했다.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동생에게 요즘 갖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최신식 그래픽 카드가 달린 수냉 커스텀 PC를 갖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780만 원짜리 컴퓨터를 사주고 똑똑한 개발팀장을 얻었다. 지금도 그 팀장님과 780만 원짜리 컴퓨터는 우리 회사의 1호 개발자와 개발용 PC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서류 작업이 너무 많아 서무보조를 맡아주실 분을 채용했다. 그분은 우리 회사의 첫 정직원이었다. 처음부터 간단한 일을 위해 채용을 진행했던 터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어쩜, 그분은 보물 같은 분이었다. 우리 셋은 밤을 지새우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나, 개발팀장님, 경영 팀장님까지 우리 회사는 3명이서 작년 대비 400%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다음 해에는 디자이너님과 능력 있는 개발자님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우리 회사는 20억에 가까운 매출을 내는 회사로 성장했다.
갈등을 겪다.
반대로 그 과정에서 상처가 되는 작별도 많았다. 업계에서 좋은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투명한 소통을 하지 못했던 것이 병폐였다. 나는 나와 같이 모든 열정을 쏟아내며 회사를 키워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 업계는 워낙 채용 경쟁이 심했던 터라, 채용 과정에서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이 스타트업에 헌신해 달라’고 말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이 자율적이고 복지가 많은, 모든 게 행복한 회사처럼 채용 브랜딩을 했다. 그랬더니 당연히 워라밸이 좋고 안정적인 회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지원했고, 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내년 2월에 있을 사업에서 20억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경력직 분들을 모시게 되었다. 이를 대비해 2월에 있을 컨소시엄 영업을 11월부터 준비했다.
그러나 마감 3주 전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결국 내가 모든 것을 하나씩 마이크로하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세세하게 지시하니 사람들은 점 점 더 일에 흥미를 잃었고,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의욕과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작업한 결과물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마감 직전에 내가 직접 모든 제안서를 뜯어고쳐 만족스럽지 못하게 제출을 마쳤다. 이 상황에 ‘주말에 나왔으니 유급휴가를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일을 촉박하게 준 것도 아닌데 유급휴가는 안 된다고 거절하자 한 분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회사의 흉을 보며 비꼬았다. 더 이상은 안될 것 같다고 판단한 나는 당일 권고사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채용은 무조건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은 채용 담당자를 3명이나 거치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기에 바빴다. 분위기가 안 좋으니 기존 인력의 리텐션이 낮았다. 덩달아 채용 담당자도 고역이었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지금의 채용 담당자, 비키를 만나게 되었다. 비키는 전사 조직에게 ‘우리는 5년 동안 일에 미칠 사람들만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히 소통했다. 그리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빠르게 떠날 것’을 권고했다. 그랬더니 리텐션이 오르며 회사가 바뀌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 명확하고 투명한 소통이 이뤄지면서 회사는 한층 더 단단해진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나는 이제 채용공고, 면접, 입사 직전, 입사 후로 끊임없이 강조한다.
여기는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을 원하는 사람들만 모였어요. 그래서 다들 비정상적이게 일에 미쳐있어요.
우리 회사에서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아요.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성장하고 성취할 뿐이에요.
때문에 아무도 시키지 않고, 모두가 휴일 없이 일하죠.
제가 드린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공감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합류하시지 않는 것을 추천드려요.
전부를 걷다.
이렇게 정신없이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는 과정에서도 회사는 쉬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강남으로 사무실을 확장했고, 아버지가 어머니까지 회사에 앉혀 가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다 활용했다. 특히 어머니는 회사에 총무로 와 계신데,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매일 밤늦게 퇴근하셨다. 최근에는 1년 간 너무 무리한 탓에 갑상선염이 심하게 오셔서 쓰러지기도 하셨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다시 회사에 나와 밤낮으로 총무 업무를 보신다. 은퇴를 앞두고 계시던 아버지는 정부 고객사가 많은 지방으로 고객사 미팅을 다니시느라 부쩍 흰머리가 늘었다. 지난달에는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부모님께 2년만 더 버텨달라는 사이코패스 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이 회사를 성공시키고 지옥에 갈 수 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렇게라도 성공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나는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꿈은 없다. 애초에 사치품에 욕심도 없고, 돈은 필요할 때 내 능력으로 얼마든지 벌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백억의 돈이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훨씬 더 큰돈이다! 나는 세상의 큰 문제를 풀어나가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본질을 우회하는 해결 방법은 만들고 싶지 않다.
테슬라의 하이퍼루트 프로젝트를 아는가? 길이 막히니, 땅 밑에 새로운 터널 길을 만들어 막힘없이 고속 주행을 하겠다는 프로젝트다. 그래. 길이 막히면 안 막히는 길을 새로 만들면 된다. 누구나 생각하는 해결책이지만, 누구도 할 수 없던 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엄청난 자본! 이것이 바로 원하는 거이다. 강남의 팬트하우스를 살 수 있는 돈이 아니라, 강남을 만들 수 있는 돈을 원한다.
우리는 현재 인공지능 솔루션 개발을 넘어, 초거대 3D 생성 인공지능을 계획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최적의 생태계 시스템이 반영된 도시까지 개발할 예정이다. 어떤가, 터무니없어 보이는가? 이미 5년 전 회사를 세울 때도 10명 중, 10명이 내 실패를 장담했다. 대학교 2학년 여대생이 인공지능 회사를 차려 매출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5년 뒤, 우리는 매년 30억이 넘는 매출은 물론 14억의 영업이익까지 달성했다.
방금 도시 개발이 터무니없다고 나의 실패를 단정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묻고 싶다.
어떤가, 내가 아직도 터무니없어 보이는가?
해 낼 것이다.
나는 해 낼 것이다. 또 여기저기 찢기겠지만 계속해서 더 큰 문제에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30명의 팀원들, 그리고 미래에 만날 더 많은 팀원들과 함께 풀어낼 것이다.
앞으로도 리더로서 많은 쓴소리를 듣고, 또 우리 모두를 위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몇 번 실패할 수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성공해 낼 것이니!
2024.05.22